선의왕후 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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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8대 왕비 선의왕후 | 宣懿王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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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의릉(懿陵) | |||||
재위 | 조선 왕세자빈 | ||||
조선 왕비 | |||||
조선 왕대비 | |||||
1. 노론계 세자빈 [편집]
2. 늦은 왕비 책봉 [편집]
3. 왕세제 책봉 [편집]
경종 1년, 경종 부부에게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하여 노론 4대신(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와 혜순왕대비 김씨(인원왕후)의 강력한 추진으로 연잉군(영조)의 왕세제 책봉이 결정되었을 때, 선의왕후의 나이는 갓 17세에 불과했다. 일설에 따르면 연잉군을 반대하여 종실과 비밀리에 연합하여 소현세자의 직손인 밀풍군 탄, 혹은 밀풍군의 아들인 관석을 입양하려 하였으나 경종의 급서로 실패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기록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선의왕후가 이인좌 등에게 비밀리에 언문교서를 내렸는데 "왕실의 씨가 바뀌었으니 바로 잡아라"는 하교를 내렸다고 전한다. 이인좌 등이 왕대비(선의왕후)의 밀명을 받았다고 주장한 흔적은 영조 실록에 수차례 등장한다.
또한 효장세자 독살 사건의 배후로 추정되는데 당시 세자를 독살한 궁인이 왕대비 어씨를 끌어들였다. 일개 궁녀가 국본인 왕세자를 독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당시 친국에서도 궁녀가 김상궁이 사주했다고 납초하였고 실록에도 김상궁은 동조(東朝)를 섬기던 상궁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는 점, 영조가 이를 서둘러 차단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기록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선의왕후가 이인좌 등에게 비밀리에 언문교서를 내렸는데 "왕실의 씨가 바뀌었으니 바로 잡아라"는 하교를 내렸다고 전한다. 이인좌 등이 왕대비(선의왕후)의 밀명을 받았다고 주장한 흔적은 영조 실록에 수차례 등장한다.
또한 효장세자 독살 사건의 배후로 추정되는데 당시 세자를 독살한 궁인이 왕대비 어씨를 끌어들였다. 일개 궁녀가 국본인 왕세자를 독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당시 친국에서도 궁녀가 김상궁이 사주했다고 납초하였고 실록에도 김상궁은 동조(東朝)를 섬기던 상궁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는 점, 영조가 이를 서둘러 차단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4. 영조 즉위와 왕대비가 되다 [편집]
1724년 경종이 사망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불과 20세의 나이로 왕대비가 되었다. 영조 2년에는 대비전이 있는 창덕궁이 아닌 경종이 세자 시절 거처하던 창경궁 저승전(...)에서 지냈으며, 1730년 8월 12일(음력 6월 29일) 경덕궁 어조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의왕후를 죽음으로 이끈 병명은 밝혀지진 않았으나 실록에서 왕후가 죽기 전날의 기록을 보면 죽기 직전까지 몸을 떨며 통곡을 하고 읍성(눈물을 흘리며 우는 소리)을 냈다고 한다. 또한 손으로 뭔가를 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영조가 의관들에게 그러한 증후를 본 적이 있는지 묻자 중관이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
선의왕후를 죽음으로 이끈 병명은 밝혀지진 않았으나 실록에서 왕후가 죽기 전날의 기록을 보면 죽기 직전까지 몸을 떨며 통곡을 하고 읍성(눈물을 흘리며 우는 소리)을 냈다고 한다. 또한 손으로 뭔가를 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영조가 의관들에게 그러한 증후를 본 적이 있는지 묻자 중관이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
5. 죽음 이후 [편집]
6. 야사 [편집]
- 시동생인 영조와 사이가 두드러지게 좋지 않았는데, 즉위 초부터 선의왕후는 남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영조를 위한 예식과 절차를 거부하기 일쑤였고, 영조는 왕대비(선의왕후)에게 올려지는 물품을 매번 삭감하여 국고나 백성에게 돌렸다. 왕대비(선의왕후)에게 진연을 올리자는 홍치중의 주청이 있자 영조가 진노어린 비답을 내려 종실 전성군 이혼 등 종친부가 일제히 상소하여 진연 올리기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조는 "나의 성의가 부족한 것 때문에 (선의왕후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며 비난과 책임을 회피하였고, 이후 진연을 올리는 것이 정해지긴 하였지만 수차례 연기되었다. 심지어 영조는 선의왕후의 국상 기간 중에[4] 후궁 귀인 이씨(훗날의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를 내명부 정1품 빈(嬪)으로 삼고 대대적인 잔치를 열어 도성 안팎은 물론 노론 대신들까지 탄식을 쏟아낼 정도였다.
- 선의왕후가 사망한 이유는 지문에 기록된 대로 오랜 지병을 앓아서가 아니라, 죽기 약 4개월 전인 1730년 4월 15일에 발생했던 영조 암살 미수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어조당에 유폐되자 분개하여 식사를 거부한 끝에 아사한 것이라고 전한다.
7. 미디어 [편집]
- 《조선왕조 500년 - 한중록》의 선의왕후
- 《복원가의 집》에서 경종과 함께 등장한다. 원귀가 밤마다 의릉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왕릉을 보호하는 결계 때문에 입구의 홍살문만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주인공 유성우와 중평군 일행이 의릉을 방문했을 때 봉분 위에 앉아 '언제 오려나?'만 반복해서 되뇌인다. 그러다가 유성우가 감정을 맡은 궁중 유물 중 왕실용 물건치고는 수수한 신발이 있어 선의왕후에게 가져가자 '은향에게 줄 선물'이라는 말이 나온다. 나중에 밝혀진 진실은, 의릉으로 들어오려던 원귀의 정체가 바로 은향이었다.
선의왕후가 입궁했을 때 경종의 측근들은 왕비를 감시할 목적으로 궁녀 은향을 심어두나, 선의왕후는 음모를 꾸미는 건 고사하고 뭘 해도 어설픈 허당이라 은향이 일거수일투족을 챙겨줬고 그런 은향이 고마웠던 선의왕후는 윗사람이 내리는 선물을 받아도 아랫사람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신발을 마련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와 선의왕후의 배려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은향은 함경도에 있는 부모를 만나고 온다며 궁궐을 떠나지만 배신을 눈치챈 경종의 측근들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된다. 이런 내막을 알지 못한 선의왕후는 은향을 기다리며 '언제 오려나?'를 연신 반복했던 것.
원귀가 된 은향이 느슨해진 결계를 넘어 의릉으로 들어오자 선의왕후는 '함경도까지 다녀오느라 오래 걸렸나보구나. 먼 길 갈 때 이걸 신으면 발이 아프지 않을 게다.'라고 말하며 신발을 건네주고, 은향은 원귀의 모습에서 정화되어 신발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성불한다.
8. 여담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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